6일 저녁, 오랜만의 충격을 겪은 핌이는 괜찮아질 때까지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.
전에 적었다시피, 핌이는 안 좋은 상태에선 영 입맛이 없다.
몸이든 마음이든 아프면 뭔가에 끌린다거나 하지 않아서, 폭식증 걱정은 없다.
이 상태가 나아진다면 입맛도 정상적인 궤도에 들겠지만.
지방이 얼마나 있는지 손가락으로 찔러서 봤는데, 단단한 거 같은 느낌이랑 달리 손가락은 푹푹 들어간다.
이 때는 수술받기 전이어서 이틀에 한 번씩 근력 운동하고 있긴 했었지만, 운동 루틴을 복근 운동 중심으로 좀 수정해야겠다.
왜냐면 핌이는 신체 부위에선 그나마 복부가 지방이 덜 있기 때문이다...
공복의 첫 식사로 당근주스를 꺼내 마시고, 주스 마신 컵에 물을 따라서 영양제랑 먹었다.
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리던 그림을 꺼냈다. 그저 멍한 가운데 생각나는 건 그림이었다.
붉은 바탕은 그릴 때 그림을 제일 잘 보이게 해 준다. 그림을 꺼냈어도 작업이 잘 되지 않았다. 눈앞의 무엇을 어떻게 그려나갈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. 너무 큰 우울감도 창작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구나.
죽은 것 같은 감정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건 습관화된 일과뿐인 것 같다.
이렇게 생각하니 우리 아부지는 핌이에게 있어서 주술사와 비슷하다. 아부지가 평소 하시는 건강정보 설파가 이럴 때 큰 작용을 하는 거보니.
비록 먼 제주도에서 혼자 있지만, 부모님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지대한 영향을 준다.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.
녹즙 마니아 마냥 레몬주스를 만드는 모습과 달리, 머릿속은 살날이 얼마 안 남은 걸까? 하는 생각 중이었다.
스스로를 괴롭혀서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고, 직접 아프고 싶지도 않지만. 그냥 그런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는데 뭐.
더 이상한 생각에 빠지기 전에, 마지막으로라도 부모님이나 언니를 만나야 할 것 같았다. 한풀이를 할 생각도, 위로를 받을 생각도 없지만. 또 그런 걸 누가 해준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없다는 것도 알지만. 그냥 제주도에서 여행 다니는 아부지랑 엄마를 상상했고 따라다니고 싶었다. 하지만 각자 할 일이 있고, 고민이 있고, 삶이 버거운데. 아무리 가족이라도 느닷없이 만나자고 약속을 잡으려 하면 난감해하겠지.
아부지께서 핌이가 제주도에서 혼자 우는 꿈을 꾸셔서, 마음이 너무 안 좋아서 별일 없냐고 하신 적이 있다. 핌이가 두고 갔던 전자기타를 잃어버려서 골목을 헤매시는 꿈을 꾼 적도 있다고. 그 기타 중고로 산 건데 너무 바가지 가격으로 샀었던 거. 스무 살 때라 뭣 모르고 산 거였는데 아부지한테 이런 식으로 슬픔을 드리다니ㅠ 대체 언제 효도를 할까나? 그런 얘기를 하면 아부지는 네가 지금처럼 잘 있는 자체가 효도라고 하신다. 우리 아부지의 이런 면모 덕분에, 핌이는 딱히 다른 성인군자를 섬길 필요를 못 느낀다. 그러니까 핌이가 교회 안 다니는 건 다 아부지 때문이야!
여튼 아부지가 LED 조명이 들어오는 거울을 보내주셔서, 이 날은 한참 거울을 들여다 봤다.
갑자기 거울을 보내주겠다고 하셔서 왜냐고 여쭸더니,
거울에 비친 사람이 하는 말을 잘 따라야 한다고 하셨다. 그 사람은 별 말을 안 하던데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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